고대사에 나오는 生死
처음과 끝이 있음을 알고,만남과 이별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 내 인생에 만족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길을 가리다
아래 글을 읽어 보세요~
죽음이란 인간의 시간이 끝났다는 의미이고,
혼(魂)과 넋이 분리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맞으면
다시 새로운 시간을 부여 받기 위해
칠성판 위에 올려 놓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
- 혼은
비상하고, 백은 흩어 진다- 라고 한다.
천지간에 모든 것에는 기(氣)가
있으며,
기가 소멸하면 죽음이
온다.
기는
정령(精靈)이며, 서양에서는 요정이라고 말한다.
예기(禮記)에 보면
천자(天子, 황제)가 죽는 것을 붕(崩)이라 하고,
제후(諸侯)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사(士)는 불록(不祿 - 죽으면 녹을 받지 못한데서 나온 말),
서인은 사(死)라고 한다.
또 죽어서 침상에 있는 것을 시(尸)라 하고,
관(棺) 속에 있는 것을 구(柩)라고 한다.
새가 죽는 것을 강(降)이라 하고,
네발 짐승이 죽는 것을 지(漬)라고 하며,
구난( 寇難 : 외국의 침략)에 죽는 것을 병(兵)이라
한다.
서경(書經) 홍범편에
오복(五福)은 수(壽), 부(富), 강(康), 덕(德), 명(命)으로
命은 '자기 집에서 일생을 편안히 마치기를 바란다' 는
고종명(考終命)이다.
우리
민족의 최대 민속놀이인 윷놀이를 보자.
학자들에 따라 돼지(豚),
개(犬) 등 가축의 명칭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윷놀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태어나다'를
'태'라고 하는데
그 고형(古形)은 '타'이고, '도'의
원형이다.
태어나서 머지않아 '게(기어
다니다)'하고,
이어서 '걸(걷다)'하게
된다.
걷게 되면 '윷(나아 가다)'하게 되는
데,
결국 '모(墓)'에 들어 가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상여의 곡소리인 '어이 어이'는
임금님 수레인 어이(御車+多)로,
임금님이 나아가시는 길 즉, 어로(御路)이다.
이는 망자를 받드는 형식이며,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려는
산 자의 자위의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흥을 돋울 때 부르는 '얼시구 절시구'의
노랫말에서
乙十口 節十口'의 '十口'는
태어남이요,
후렴의 '乙尸口 節尸口'의
'尸口.는 죽음이니, 생사를 가름한다.
천부경에서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은
'하나에서 시작하여 끝남이 없는 영원히 이어진다' 이니,
천국과 윤회사상으로 영과 육이 회귀되는 종교의 사후관과
맥락이 이어짐이다.
기원전 17세기 경,
지중해 연안국 페니키아가 창안한 문자 '알파와 오메가'는
알파벳의 시원으로 '처음과 끝'을 나타낸다.
알파는 소 뿔을 상형한 글로 처음에는 ‘V’자 형태였으나,
후에 아랄의 해가 떠 오르는 태양을 상형한글 모양으로 탄생이요,
오메가는 묘를 상형한 글 모양으로 죽음을 나타낸다.
또 '요람에서 무덤까지 (From the womb to the tomb)'의 womb은
자궁(子宮)이니 태어남이요,무덤 tomb은 죽음을
말한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위고는 그의 저서에서
'오늘 내가 사는 목적은 싸우는 데 있다.
내일 내가 사는 목적은 이기는 데 있고,
일생동안 내가 사는 목적은 잘 죽는 데 있다'
이 또한 고종명(考終命)이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독설가였던 버나드 쇼는
자기의 묘비명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고 새겼다고 한다.
일생의 삶이 그리도 허탈함이었을까.?
'아테나의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새로운 신을 섬긴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얼굴을 감싸고 통곡하자,
소크라테스는 '웬 곡소리들인가, 이런 창피한 꼴을 보게 될까 봐
아낙네들을 먼저 보냈거늘,
사람은 마땅히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고 들었네,
조용하고 꿋꿋하게 행동하게' 라며 태연히 독약을 마셨다.
죽음에 대한 표현은 종교 마다 다른 용어를 쓴다.
불교에서는
열반(涅槃)이나 입적(入寂)이라고 쓴다.
두 말은 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나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석가모니와 고승의 죽음을 가르키는 말이다.
또한 불교에는 신라 때 자장(慈藏)스님이 시체 옆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육신이 썩어 백골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수행,도를 터득했다는 백골관(白骨觀) 수행법이 있다.
천주교는
서거(逝去)를 선종(善終)이란 말로 썼다.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끝마친다'는 뜻으로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매년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세상과
이별한다'는 뜻의 별세(別世)를 쓰기도 하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는 소천(召天)을 쓰기도 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누가복음(20:38)의 기록도
보인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에서는
모든 생명은 바로 한울님 곧 우주라는 커다란 생명에서
온 것이며 동시에, 죽게 되면 이 우주의 커다란 생명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며 환원(還元)이라는 용어를 쓴다.
-한울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
" 그 아들을 알지 못할 때는
먼저 그 아버지를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을 모를 때에는 그 벗을 보아야 하며
그 땅을 모를 때에는 그 초목을 보아야 한다.
善人(선인)과 한자리에 앉으면
芝蘭(지란)의 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 향내에 동화하는 것이고
不善(불선)한사람과 한 자리에 앉으면
생선가게에 앉아 있는 것 같아
그 냄새에 동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처한바를 엄격히 하여야 한다."
공자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공자의 이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아버지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아버지도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쟁시대"에 살면서
성인군자처럼 살면서 행세하라는 것은
시대감각을 전혀 모르는 착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답게 살려면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교훈이다.
조선조의 명재상
황희는 자기 훈계를 듣지 않고
주색에 빠진 아들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문밖으로 나아가 아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맞아 들였다.
아들이 의아해서
" 아버님 어이된 일이옵니까?
의관속대를 하시고 저를 맞아 주시니...."
이에 황희정승이 정중히 대답했다.
"아비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 내집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한집사람이 아닌 나그네가 내집을 찾으면
이를 맞는 주인이 인사를 치르지
않으면 어찌 예의라 이르겠느냐..."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를 보고
그 아들이 어떻게 죄스러워 했을까 하는
사족은 달 필요가 없겠다.
공자에게
庭訓(정훈)이 있었드시 황희에게는 이러한
家訓(가훈)이 있었다.
그런데
어버이를 모신 오늘의 자식들은
이 두 일화를 어떻게 받아 들일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알마냐크의
속담집에 이런것이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을 할때에는 부자가 함게 웃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선물을 할때에는
둘이다 눈물을 흘린다"고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효의 원형이다.
카네이숀 한송이로
효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불효의 표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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