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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강화 나들길을 따라 찾은 섬

교동도의 역사는 꽤 오래돼서 고림(高林) 또는 달을신(達乙新)으로 불리다가 고구려 때 처음으로 고목근현이 됐고 신라가 세력을 넓혔을 때부터 교동현으로 불렸다. 이웃 강화도와 석모도가 간척으로 현재의 해안선을 가졌듯이, 교동도 역시 마찬가지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화개산·수정산·율두산이 만드는 삼각점 사이의 갯벌과 바다를 메워서 넓은 농경지를 얻었다.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땅 황해도 연백군과 마주보는 최전방 섬이기도 하다. 강화도 창후리선착장에서 카페리에 올라 교동도 월선포선착장까지는 15분이면 닿는다. 물때가 좋은 날은 15분, 그렇지 않은 날은 수심문제로 멀리 돌아야 해서 1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동도,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대룡시장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한국관광공사)




쓸쓸함이 묻어나는 대룡시장

교동읍성이 옛 교동의 중심지였다면 면소재지가 있는 대룡리는 현재 교동도의 번화가(?)이자 중심이다. 대룡시장은 왠지 향수를 자극하는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몇 해 전에 어느 방송국 인기TV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찾게 된 곳이지만, 겨울철에는 그저 찬바람이 맴도는 쓸쓸한 골목길일 뿐이다.

좁은 골목길 양쪽에 늘어선 조그만 상점들과 이발소같은 건물은 척 보기에도 무척 오래 돼 보인다. 마치 오래 전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추고 그 모습 그대로 전해져오는 것만 같은 골목길을 10분 넘게 서성이건만 인적이 없다. 한참 만에 겨우 할아버지 한 분과 마주치니 "이 추운 겨울에 뭐 하러 왔소?"라며 말을 건네신다. 그리곤 낯선 방문객을 위해서 이런저런 옛 이야기를 해 주신다. 전쟁 때 황해도에서 건너온 일, 잠시 피난해 있다 보면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평생을 고향 땅을 지척에 두고 바라만 봐야했던 지난 세월에 대한 이야기들... 교동도 북단 율두산에 실향민들이 명절 때 차례를 지내기 위한 망배단이 있는 연유가 거기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동도,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대룡시장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한국관광공사)





시간이 멎은 섬

강화도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지역이지만, 교동도는 유배의 섬이다. 국난을 맞아 왕조 자체가 강화로 이전한 일이 있었기에 그런 모양이다.

22년 전인 1994년도에 이미 교동도를 방문한 바 있어 내심 강화도와 가까운 섬이니 만큼 눈에 띄는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러한 기대 속에서 강화도 창후리에 도착하여 뱃전에 올라 정확히 15분 후 교동도 월선포에 닿았다.

이윽고 교동 읍내로 들어섰을 때, 기다렸다는 듯 몰려드는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22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읍내 거리가 나의 동공 속을 애잔하게 채워진 까닭이었다. 육지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데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교동도는 시간이 멈춰 버린 섬처럼 고즈넉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읍내 거리를 걸으며 관광객이 된 심정으로 바라보니 교동도는 묘한 매력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1960~1970년대 풍의 건물과 거리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지역을 여행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마치 영화 세트장 속에 들어와 있는 듯 교동도는 어릴 적 추억 속으로 필자를 끌어당겼다.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는 교동초등학교를 잠시 구경하고 나서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에 자리잡은 시장과 상가 건물들 사이를 걸어다니다 보면 어느덧 고향마을 장터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열 살 안팎의 소년처럼 상가에 진열되어 있는 온갖 잡화와 검정고무신, 플라스틱 그릇들을 구경하며 이유 없이 마음이 설레었다.

읍내 거리에서의 아련한 과거 체험을 끝내고 다시 현실 속으로 되돌아와 섬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면 사실 섬이라고 하지만 교동도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에 속했다. 워낙 섬이 넓은데다 전체 면적에서 경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66%나 되어 농업에만 종사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의 빠른 물살이 실어 나른 진액의 땅이라 교동도의 논과 밭은 비옥하다. 교동 쌀이 예로부터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업이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에 속했던 광복 당시만 해도 교동도 인구는 8천명이 훨씬 넘었다. 게다가 전쟁을 치르면서 피난민들까지 몰려들어 한때는 1만 2천 명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산업발전 과정과 궤를 같이 하며 교동도의 인구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섬들이 겪고 있는 것처럼 교동도 또한 이도 현상이 극심한 상태였다. 4곳이나 되었던 초등학교가 2곳으로 통폐합된 것만 봐도 인구 감소 실태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듯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다. 교동도가 강화도만큼 발전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주민들은 열이면 열,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연도교 건설을 첫째 조건으로 꼽았다. 제삼자의 생각에도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연도교가 건설되어 개통되었다. 어떻게 변해 갈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리게 될는지 궁금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동도 [喬桐島] -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접경지역 (한국의 섬 - 인천광역시·경기도, 2017. 3. 15., 지리와 역사)











































“늦봄, 섬을 깨우다” 강화 교동도 72시간  (KBS다큐 3일)



남녁의 최북단 망원경으로 보니

손에 닿을듯 황해도 연백평야가보인다

사람의 오가는모습도 보이고 집들이 선명하게

겨우2.3k 민족의 아픔을 실감할수있었다

저 철조망밖이 황해도 연백땅이다

마치시계가 멈춘듯 60년도를 연상케해준다

자연그대로 살아가는 황해도 실향민들이

고향을 코앞에둔체 그리워하며 통일이 되기를

참으로세계적으로 하나뿐인  민족의 분단의아픔을

실질적으로 느끼며 돌아서는 나의 모습이 씁스럽했다

어서빨리 철조망을 걷히고 통일이 되기를 간절히기원한다~^^


2018,07,21


-風雲영국신사-영국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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